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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나는 교회에서 받는 이질감의 원인을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열린예배가 주는 경박성이며, 다른 하나는 행사중심의 교회 구조가 압박하는 영적 피로증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의 원인이 나온다. 그것은 설교 문제이다. 오늘의 목사는 설교 이외의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기 때문에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없다. 또한 목사는 교회 행사를 잘 꾸릴 수 있는 행정가로 활동하거나 아니면 신자들의 생활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상담가로 활동하면 충분하기 때문에 굳이 설교에 비중을 두지 않아도 된다. 물론 목사들이 표면적으로는 설교에 마음을 두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별로 없으며, 마음을 두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다. 구조적으로도 그렇고 자신의 내면적인 욕구에서도 역시 그렇다. 다른 일에 모든 영적인 에너지가 소진되고 고갈된 영혼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영적인 촉수(觸鬚)를 예민하게 작동시킬 수 있으며, 그런 설교가 어찌 청중들에게 생명의 충만감을 제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설교는, 좀 거칠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을 짜증나게 할 뿐이다. 짜증나는 설교! 이런 표현이 독설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니 말이다.



아주 우연하게 내 딸들이 보는 시트콤을 나도 옆에서 힐끗거리는 경우가 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이럴 때만은 내 딸들이 나를 몹시 싫어한다. 그네들의 기분을 내가 망쳐놓기 때문이다. 저게 말이 되나, 말과 표정이 따로 노네, 필요 없는 멘트군, 하는 나의 촌평이 되게 듣기 싫은 모양이다. 요즘은 내 입이 근질거려도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기 위해서 참는다. 시트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거나 아예 티브이가 없는 곳으로 피신하거나, 또는 내 딸들처럼 한번 웃고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인간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의 욕구와 연관된 설교가 바로 그런 시트콤이나 삼각관계를 다루는 멜로드라마 수준이라고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정색하고 따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영적이지 않게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 강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설교가 영적이지 않다는 말은 여러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하지만, 일단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린다면 다음과 같다. 내가 경험한 오늘의 설교는 생명의 깊이를 열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모이면 기도하고 헤어지면 전도하자는 수준의 설교에서 우리가 생명의 충만감을 느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에서 언급한 시트콤, 신파조 멜로드라마, 또는 피라미드 사업설명회,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식품 설명회, 조금 더 나아가서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강좌, 또는 유학, 이미, 진학설명회나 신입사원 강연 비슷한 열정과 내용을 담고 있는 설교에서 어떻게 생명의 신비와 희망을 발견하겠는가.



이들의 설교가 영적이지 않다는 말을 조금 더 신학적으로 정리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설교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하나님 나라, 그 통치를 성서 텍스트와 오늘의 세계 현실에 근거해서 설교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하나님 나라가 실종된 설교에서 내가 어떻게 영적인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하나님 나라만이 설교의 모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창조와 종말, 칭의, 그리고 정의와 평화라는 성서의 모든 주제들이 설교의 중심이 자리해야 한다. 특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성서 주제의 초석이기도 한다. 다만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 연관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를 할 수만 있다면, 그 설교는 건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헬무트 틸리케는 이미 오래 전에 독일교회의 강단이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 적이 있다. “종교개혁의 완성인가, 재(再)가톨릭화인가?”라는 글에서 그는 예배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의 부수적인 요소로 전락하고 있는 설교의 문제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비판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고, 여기 몇 대목을 인용하겠다.



이것에 반해서 우리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점점 더 말씀으로부터 물러 나와서 의식 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설교가 마치 수다처럼 되는대로 지껄이는 것 같고, 또 틀에 박힌 상투어들이 자동기계장치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위임된 말씀의 선포하는 무거운 짐을 아직도 지고 있는 분들, 그리고 충성스럽고 경건하게 그것을 견디고 있는 분들, 아무쪼록 나의 폭언을 용서하기 바란다. 설교자들 중에는 “거룩한 남은 자”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매도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향은 말씀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설교자가 더 이상 말씀을 대담하게 추구하지 않고 있어서 목적 있는 행위나 성례전 안에서 말씀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렇게 성례전이나 의식적인 형식의 세계가 새롭게 발견되는 것은 신앙적이고 좋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말씀이 의식 속에 살아있지 않는 한, 그 음색은 단순히 음악에 불과할 뿐이다. 아마도 들리는 소리는 후퇴나팔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149)



틸리케는 독일교회에서 설교가 수다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상투적인 종교 언어가 아무런 제어장치 없이 반복되고 있는 그 현상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설교를 마치 일간의 편집기자마저도 그렇게 하지 않는 그런 경멸하여 마땅한 잡문으로 만드는 것이다.”(150) 이런 결과를 빚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행사와 성례화이다. 목사들은 말씀소명을 진지하게 짊어지지 않고, 교회행사와 의식(儀式)으로 도피하고 만다. 이런 문제들은 내가 앞에서 지적한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들과 일치하고 있다. 틸리케가 말하는 성례화는 일종의 볼거리에 치중한 열린예배와 다를 게 없다. 소위 “경배와 찬양” 유의 예배, 대형 프로젝터를 비롯한 최첨단 시청각 기기를 통한 예배는 설교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일종의 도피로와 같다. 교회 행사의 과부하는 두 말할 것도 없다.
목사가 설교의 짐으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그 중심으로 용감하게 들어가야 한다는 틸리케의 충고는 단순히 목사의 능력개발이나 자만심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참된 설교의 회복은 하나님의 약속이 제시하고 있는 압도적인 능력을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의 진술을 다시 들어보자.



“나는 지금 단순히 ‘설교의 용기’를 북돋으려고 애쓰는 그런 평범한 것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은 용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너무 많은 부도수표를 강단에서 남발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히려 설교에 대한 그릇된 낙심이 올바르고 적절한 낙심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또한 낙심이 인간적인 슬픔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슬픔으로 변혁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슬픔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압도적인 능력을 진정 두려워할 때이다. 그러면서도 그 약속의 강력한 능력 아래에서 우리의 입이 열려서 말하게 되는 때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먼저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로서, 또한 전달자로서의 소명 앞에 바쳐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어떻게 우리의 입술이 권위 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156)



나는 틸리케의 진단과 충고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수다, 부도수표 남발, 상투성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 우리의 강단을 향해서 영혼의 귀를 기울일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들은 우리의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 아멘을 연발하며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런 포즈를 취할 뿐이지 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다. 억지로라도 앉아있는 사람은 특별히 인내심이 많거나 아니면 앉아있는 것이 자신의 이해타산과 연결되어 있지 않겠는가. 체면이든지, 명예심이든지, 심지어는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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